박정희가 벌인 사건들
생각거리 / 2007/08/24 16:44
1.워커힐 사건
워커힐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외화획득을 빌미로 하여 정부자금으로 주한미군의 종합위락시설인 워커힐을 건립하면서, 그 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된 사건이다.
1961년 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장 석정선 등은 서울시 성동구 광장동 소재의 부지 18만여평을 수용해 총규모 60억환의 사단법인 워커힐 관광사업을 시작하엿다. 이들은 교통부에 압력을 넣어 관광공사법을 제정케 하고 관광공사를 설립한 뒤 그 주관을 교통부에 넘겼다. 그러나 워커힐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산업은행의 융자거부로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교통부장관 박춘식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은 1962년 8월 13일부터 1963년 2월 21일 사이에 법적으로나 업무상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워커힐 사장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보 제2국 제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3천590만원을 전용 가불케 하였다. 임병주는 그 돈으로 워커힐 공사를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막대한 액수를 횡령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4,158대의 각종 군장비와 연인원 2만4천78명을 무상으로 노역케 하는 등 숱한 부정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과 임병주, 신두영 등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고, 미군에게 출입금지령을 내려 워커힐은 막심한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후에 워커힐은 민간에 분하되어 지금은 선경그룹(sk) 소유로 되어 있다.
2. 새나라 자동차 및 빠찡코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일본의 닷산 자동차를 불법으로 반입한 뒤 국내시장에서 시가의 2배 이상으로 팔아 거액의 폭리를 취해 문제가 된 사건이다.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일회담 차 일본에 갔을 때 '야스다 상사'의 사장 재일교포 박노정을 만나 자동차공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박노정은 전무 안석규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안석규는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의 지원으로 '새나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정부에서는 관광용 자동차 4백대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나라 회사는 자동차의 수입과 판매대행을 독점하였으며, 석정선은 인천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새나라 회사의 부지와 자재구입 등에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새나라회사는 일본에서 면세로 들여온 1천642대의 자동차를 수입가의 두 배로 판매하였다. 그 차익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석정선이 업무상 횡령, 협박과 증뢰죄로 구속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회전당구대(빠찡고) 사건은 일본으로부터 회전식 당구대 880대를 면세로 사들여 서울 시내에 당구장 영업을 허용하려 했던 사건이다. 세칭 빠찡고 사검. 당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회전당구대 1백대를 재일교포의 재산 반입인 것처럼 세관원을 속여 국내에 반입토록 한 뒤 서울시내 33군데 당구장을 개설하려 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태준 등이 관세법 위반과 문서위조 및 동행사로 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3. 차관 커미션 사건
정치자금의 가장 큰 파이프는 일본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일본돈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쓰비시의 한국측 대리인으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씨는 "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백만달러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고 주장했다.
그가 '빌렸다' 고 하는 것은 '몇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 이다. 일본돈은 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유.무상차관 형식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리베이트나 커미션이란 이름으로 정치자금화됐다.
일본 이토추 상사 서울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는 95년 일본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미국 자금도 들어왔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관계자는 "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3백만달러를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도 남아 있다.
5. 정치자금 빼돌린 증권파동
증권파동은 1962∼1963년에 중앙정보부가 대한증권거래소를 직접 장악해, 주가를 조작함으로써 엄청난 규모의 이득을 취하고 이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의심받았던 사건이다.
중앙정보부 행정처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은 농협중앙회장 오덕준, 부회장 권병호에게 압력을 넣어 당시 농협이 보유하고 있던 인기주인 한국전력 주식 12만 8천주를 시가보다 5% 싼 값으로 팔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얻은 8억 6,224만 6천 4백환을 증권업자인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제공해 통일·일흥·동양의 세 증권회사를 설립케 하고, 대한증권거래소 총주식의 70%를 점유토록 하는 한편, 윤응상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앉혔다.
윤응상의 독무대가 된 증권거래소는 증권거래법과 거래소의 사업규정을 무시하고 윤응상계의 증권회사를 불법적으로 지원하여 이들 회사의 주식을 폭등하도록 조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약속한 결제를 이행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주가를 폭락시켰고, 이 과정에서 5, 340명에 달하는 군소 투자자들이 136억 6천만환에 이르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숱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등 사회적으로 엄청난 물의가 일어나자 군정은 이영근·윤응상·서재식 등을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구속하였다.
6. 지하철 부정사건
서울 지하철 차량 도입사건은 박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의혹은 일본의 네 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두배나 높게 받은 데서 비롯됐다. 네 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인데,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 250만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 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그 유력인사가 한국의 거물정치인 김성곤이라고 박혀졌다. 사실상 리베이트로 받은 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이는 또 일본의 정치가에게로 흘러가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었다.
7. 김형욱 실종사건
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갑자기 파리에서 실종됐다. 김형욱은 10월 1일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 리츠호텔에 묵다가 실종 당일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겨 짐을 풀고 오전 11시 30분쯤 ‘키 큰 동양인’과 함께 카지노에 들렀었다.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설들이 난무했지만 사람들은 우리 정보기관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6년 3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을 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망명,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 박 대통령의 표적이 됐다는 게 근거였다.
이 때문에 김형욱이 미국에서 회고록을 출간하려 할 때 막후협상을 벌였던 김재규 중정부장과 박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할 줄 아는 불 같은 성격의 차지철 경호실장이 주로 배후인물로 의혹받아 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관련자들이 이미 죽었거나 입을 닫고 있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8. 공화당 4인방의 항명파동
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 통과는 오장관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김종필 당시 총리에 대한 '공화당 실세 4인방' 의 반란이었다.
당시 국회의 의석 분포는 여당인 공화당 1백13석.신민당 89석.기타 2석으로 함께 제출된 김학렬 재무장관과 신직수 법무장관 해임안은 부결됐는데도 오장관 해임안은 총투표 2백3표 중 찬성 1백7표, 반대 90표, 무효 6표로 가결됐다. 공화당에서 최소한 20표 이상이 이탈한 것이다.
이 항명사태는 김성곤당 중앙위원장, 길재호 사무총장, 백남억당의장, 김진만 재정위원장 등 4명이 주도했고 이 사태 이후 이들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참고: 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된 사건.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도쿄 한민통 결성을 5일 앞둔 사건 당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팰리스호텔에 간 그는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이 사건현장에서 김동운 주일 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가 관련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며 거부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 한일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 사과방일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건 진상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워커힐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외화획득을 빌미로 하여 정부자금으로 주한미군의 종합위락시설인 워커힐을 건립하면서, 그 자금 가운데 상당부분을 횡령하여 공화당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된 사건이다.
1961년 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장 석정선 등은 서울시 성동구 광장동 소재의 부지 18만여평을 수용해 총규모 60억환의 사단법인 워커힐 관광사업을 시작하엿다. 이들은 교통부에 압력을 넣어 관광공사법을 제정케 하고 관광공사를 설립한 뒤 그 주관을 교통부에 넘겼다. 그러나 워커힐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산업은행의 융자거부로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교통부장관 박춘식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은 1962년 8월 13일부터 1963년 2월 21일 사이에 법적으로나 업무상 아무런 상관도 없는 워커힐 사장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보 제2국 제1과장 중령)에게 정부주식 출자금 5억3천590만원을 전용 가불케 하였다. 임병주는 그 돈으로 워커힐 공사를 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막대한 액수를 횡령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4,158대의 각종 군장비와 연인원 2만4천78명을 무상으로 노역케 하는 등 숱한 부정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과 임병주, 신두영 등이 구속되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고, 미군에게 출입금지령을 내려 워커힐은 막심한 재정난을 겪어야 했다. 후에 워커힐은 민간에 분하되어 지금은 선경그룹(sk) 소유로 되어 있다.
2. 새나라 자동차 및 빠찡코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일본의 닷산 자동차를 불법으로 반입한 뒤 국내시장에서 시가의 2배 이상으로 팔아 거액의 폭리를 취해 문제가 된 사건이다.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일회담 차 일본에 갔을 때 '야스다 상사'의 사장 재일교포 박노정을 만나 자동차공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뒤, 박노정은 전무 안석규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한국에 들어온 안석규는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의 지원으로 '새나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정부에서는 관광용 자동차 4백대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새나라 회사는 자동차의 수입과 판매대행을 독점하였으며, 석정선은 인천시장에게 압력을 넣어 새나라 회사의 부지와 자재구입 등에 편의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새나라회사는 일본에서 면세로 들여온 1천642대의 자동차를 수입가의 두 배로 판매하였다. 그 차익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석정선이 업무상 횡령, 협박과 증뢰죄로 구속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회전당구대(빠찡고) 사건은 일본으로부터 회전식 당구대 880대를 면세로 사들여 서울 시내에 당구장 영업을 허용하려 했던 사건이다. 세칭 빠찡고 사검. 당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회전당구대 1백대를 재일교포의 재산 반입인 것처럼 세관원을 속여 국내에 반입토록 한 뒤 서울시내 33군데 당구장을 개설하려 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태준 등이 관세법 위반과 문서위조 및 동행사로 군법회의에 송치되었다.
3. 차관 커미션 사건
정치자금의 가장 큰 파이프는 일본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일본돈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쓰비시의 한국측 대리인으로 이후락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씨는 "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백만달러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고 주장했다.
그가 '빌렸다' 고 하는 것은 '몇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 이다. 일본돈은 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유.무상차관 형식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리베이트나 커미션이란 이름으로 정치자금화됐다.
일본 이토추 상사 서울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는 95년 일본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미국 자금도 들어왔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관계자는 "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3백만달러를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도 남아 있다.
5. 정치자금 빼돌린 증권파동
증권파동은 1962∼1963년에 중앙정보부가 대한증권거래소를 직접 장악해, 주가를 조작함으로써 엄청난 규모의 이득을 취하고 이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의심받았던 사건이다.
중앙정보부 행정처장 이영근, 관리실장 정지원 등은 농협중앙회장 오덕준, 부회장 권병호에게 압력을 넣어 당시 농협이 보유하고 있던 인기주인 한국전력 주식 12만 8천주를 시가보다 5% 싼 값으로 팔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얻은 8억 6,224만 6천 4백환을 증권업자인 윤응상에게 자본금으로 제공해 통일·일흥·동양의 세 증권회사를 설립케 하고, 대한증권거래소 총주식의 70%를 점유토록 하는 한편, 윤응상의 심복인 서재식을 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앉혔다.
윤응상의 독무대가 된 증권거래소는 증권거래법과 거래소의 사업규정을 무시하고 윤응상계의 증권회사를 불법적으로 지원하여 이들 회사의 주식을 폭등하도록 조작하였다. 그러나 이들 회사는 약속한 결제를 이행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주가를 폭락시켰고, 이 과정에서 5, 340명에 달하는 군소 투자자들이 136억 6천만환에 이르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숱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등 사회적으로 엄청난 물의가 일어나자 군정은 이영근·윤응상·서재식 등을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구속하였다.
6. 지하철 부정사건
서울 지하철 차량 도입사건은 박정권이 일본에서 지하철 차량을 도입하면서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것이다. 의혹은 일본의 네 개 회사가 한국에 납품하는 지하철 차량 가격을 두배나 높게 받은 데서 비롯됐다. 네 개 회사가 지하철 차량 납품으로 거둔 이익은 모두 21억 7천만엔인데,미쓰비시 상사 사장은 그중 250만달러를 한국 유력 인사의 지시로 한국외환은행 뉴욕 지점에 송금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그 유력인사가 한국의 거물정치인 김성곤이라고 박혀졌다. 사실상 리베이트로 받은 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됐다. 김성곤 계좌로 입금된 250만 달러 중 120만 달러가 한국으로 가고 나머지 130만 달러가 일본으로 역송금된 것이다. 이는 또 일본의 정치가에게로 흘러가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었다.
7. 김형욱 실종사건
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갑자기 파리에서 실종됐다. 김형욱은 10월 1일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 리츠호텔에 묵다가 실종 당일 웨스트엔드 호텔로 옮겨 짐을 풀고 오전 11시 30분쯤 ‘키 큰 동양인’과 함께 카지노에 들렀었다. 실종을 둘러싸고 여러 설들이 난무했지만 사람들은 우리 정보기관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6년 3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며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 역을 하다가 1973년 미국으로 망명,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 박 대통령의 표적이 됐다는 게 근거였다.
이 때문에 김형욱이 미국에서 회고록을 출간하려 할 때 막후협상을 벌였던 김재규 중정부장과 박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할 줄 아는 불 같은 성격의 차지철 경호실장이 주로 배후인물로 의혹받아 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관련자들이 이미 죽었거나 입을 닫고 있어 한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8. 공화당 4인방의 항명파동
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안 통과는 오장관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김종필 당시 총리에 대한 '공화당 실세 4인방' 의 반란이었다.
당시 국회의 의석 분포는 여당인 공화당 1백13석.신민당 89석.기타 2석으로 함께 제출된 김학렬 재무장관과 신직수 법무장관 해임안은 부결됐는데도 오장관 해임안은 총투표 2백3표 중 찬성 1백7표, 반대 90표, 무효 6표로 가결됐다. 공화당에서 최소한 20표 이상이 이탈한 것이다.
이 항명사태는 김성곤당 중앙위원장, 길재호 사무총장, 백남억당의장, 김진만 재정위원장 등 4명이 주도했고 이 사태 이후 이들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참고: 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된 사건. 1972년 신병치료차 일본에 체류중이던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73년 7월 재미교포 반체제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를 결성하는 등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도쿄 한민통 결성을 5일 앞둔 사건 당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팰리스호텔에 간 그는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야 서울 자택 부근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이 사건현장에서 김동운 주일 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고 관련자 출두를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가 관련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며 거부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 한일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 사과방일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건 진상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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